본문바로가기


進理가 너희를 自由케 하리라
입학상담

  • 입학상담안내 922-6703~5


페이지 위치
새소식

> 입학상담 > 새소식

상세보기
[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6] 점심 도시락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10-22 03:45:22 조회수 407

점심 도시락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저, 다시 학교 갈래요.”

“학교? .......그런데?”

“아버지께서 학교에다 말씀 좀 해주십사 하고요.

제가 지난 3학년 2학기 때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은

사정 이야기를 선생님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알았다. 그럼 이 기회에 춘근이도 1학년에 입학시켜야겠구나.”

아버지는 선선히 승낙을 하셨다. 게다가 무슨 생각이셨는지

춘군이까지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하셨다.

춘근이는 우리 집안의 막내이자 하나뿐인 내 동생이다.

1946년 3월, 나는 다시 번암초등학교 4학년으로 들어갔고

춘근이는 1학년에 입학했다. 몇 달 놀기는 했지만, 혼자서도

그 동안 꾸준히 공부를 해왔던 까닭에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는 않았다. 특히 수학만큼은 뛰어나서 학교에

다시 다니면서 치른 첫 시험에서 1등을 했다.

그리고 영특하여 늘 수재라고 칭찬을 받던 춘근이도

1학년에서 1등을 했다.

또 나는 4학년 급장이, 춘근이는 1학년 급장이 되었다.

사시사철 내의도 없이 홑껍데기 바지저고리 한복을 휘날리며,

짚신 아니면 맨발로 학교를 다니던 두 형제가 번암초등학교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잘 했다고 해서 배고픈 문제가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지만, 번암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형제는 거의도시락을 사 간 적이 없었다.

집에 있는 식구들 한 입 먹기에도 빠듯한 마당에

도시락까지 사 갈 엄두는 아예 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맴돌았다.

철봉에도 실없이 매달려 보고, 쭈그려 앉아 심술궂게 개미의

앞길을 방해하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내 그 시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내 처지가 부끄러웠다.

나는 이상하고 독하리만큼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맹물을 마시며 배를 채웠고,

집으로 돌아오는 개울가 바위 틈을 헤치고 생가재를 잡아 먹을지언정

결코 남의 음식을 탐하지도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가끔 감자를 삶아주시거나

잡곡이 더 많이 섞인 누룽지를 주먹밥처럼 뭉쳐서 도시락

대신 싸주시곤 했다.

또 어떤 때에는 감이나 밤 몇 톨을 점심으로 내어주시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학교에 가져가지 않고,

퇴비나 사료로 쓰기 위해 태령 중턱에 잔득 쌓아 두었던

건초더미에 찔러 넣어 두었다.

그것이 궁상스럽고 변변하지 못하여 창피했던 것이 아니다.

더욱 허출할 때에 먹기 위해 비축을 하는 생각이었던 성 싶다.

그래서 그런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하교길에

그것을 꺼내 맛있게 먹곤 했는데, 한창 허기진 시간이기도 했겠지만

어머니의 자상한 성심(誠心)과 더불어서 그 맛은 가히 꿀맛이었다.

그때의 넉넉지 못했던 경험은 지금껏 내 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밥 한 알, 반찬 한 가지 남기는 일이 없다.

음식은 항상 깨끗이 먹어야 함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으며,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가끔 돌발사고가 일어나 나를 슬프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그 돌발 사고란 다름 아니라 등교길에 먹거리를 찔러 두었던

건초더미가 없어지는 일이었다.

건초더미는 퇴비나 사료로 쓰려는 사람이 짊어지고 가버렸겠지만,

그 속에 넣어둔 내 소중한 점심 누룽지까지 함께 날아가 버렸으니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

그것을 먹을 요량으로 잔뜩 기대에 부풀어 발걸음을 재촉하여

달려왔다가 그만 그 실망과 상실감으로 허기증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배가되어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첨부파일  

Quick Menu

  • 강의시간
  • 질의응답
  • 오시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