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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식 이사장 자서전 4]배움의 기쁨으로 만학천봉(萬壑千峰)을 넘으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9-03 07:40:22 조회수 365

배움의 기쁨으로 만학천봉(萬壑千峰)을 넘으며

어쩌면 그렇게도 혹독하고 끔찍하게 가난했던 생활

속에서 어떻게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은 분에

넘치고도 당돌한 결심이었다.어린 나이였지만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아버지나 형님들처럼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일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이나

형님들과는 달리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이든지 배우고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막연했지만 단호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는 일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었다.

10여 가구 남짓한 성암리 깊은 산골에 학교가

있을 리도 만무하여 결국 번암면사무소가 있는

번암초등학교까지 가야 했는데,그 길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7Km가 넘는20여리의

먼 길을,그것도 태령 고개의 산길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등교길이었다.

또한 길이 제대로 나 있을 리도 없었다.

울퉁불퉁한 돌부리와 칡덩굴과 나무뿌리가

우거진 풀밭의 좁은 길을 걷노라면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독사,늑대,여우 등이 득시글거렸기 때문에

가슴은 겁에 질려 마구 두근거리고,

가끔 날짐승이라도 한 마리 푸드득 날아

오르기라도 하면 머리끝이 쭈뼛 일어서는

공포 때문에 옴짝달짝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허겁지겁 태령을 넘고나서 보면

꿰어신은 짚신쪼가리는 어느 틈엔가

날아가 버리고 맨발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봄과 가을은 괜찮았다.눈이라도

펑펑 쏟아지는 겨울철에는 정말로 고난의

학교길이었다.그 당시에는 눈이 왔다 하면 수십

길씩 쌓이는 일이 예사였으니 옳게 신을 만한 양말

한 켤레,번듯한 신발 한 켤레 있을 리 없는 빈한한

형편이고 보니 눈길은 그냥 거추장스럽고

거북하기만 할 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집을 막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발 시렵지?”

“견딜 만 해요.”

“자,이거 신고 가거라.”

어디에서 구하셨는지 어머니께서 홑버선 한 켤레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추운 겨울,그것도 눈 쌓인 산길을

맨발로 다니는 자식이 무척이나 안쓰럽고 애처로우셨던

모양이다.그러나 정작 나는 그 버선을 신고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언 발을 채 녹일새도 없이 가족들을

위해 종일 동동거리며 애쓰시는 어머니께도

송구스러웠고,눈 덮인 산길에 신고 나섰다가는

이내 더러워질 것이 번하니 아까워서도

신을 수가 없었다.나는 그 버선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이후 특별한 날만을 골라 두고두고 신었다.

사실 그 당시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소레’라고 하여 엄지발가락을

끼는 지금의 슬리퍼와 비슷한 것을 짚으로

만들어 신고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그나마도

얼마간 신고 다니다 보면 금방 해져버려 발바닥에

줄줄 피가 흐르기 일쑤였고,그러다 엄지발가락의

끈마저 떨어지면 다시 맨발이 되었다.

날카로운 돌부리에 채이고,나무뿌리와 풀뿌리에 걸려

발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기쁨이 있었다.바로 공부를 하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정신적으로 나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 주었다. ]

사람은 배워야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떠한 역경도 나를 약하게 만들 수 없다는

다짐으로 늘 나를 채찍질하였다.성암리에서

나는 유독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사람은 의지만 있으면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기에

나는 불꽃 같은 의지로 향학열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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