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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공부 마라톤' 완주한 수의경영지질학사 이국희씨/서울대서 3번째 졸업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6-20 07:30:38 조회수 610

서울대서 3번째 졸업장, 내 별명은 '밥 잘 사주는 할배 선배'

50년 '공부 마라톤' 완주한 수의경영지질학사 이국희씨

지난 2월 서울대를 졸업한 이국희(72)씨는 학번이 75-73541이다. 1975년 지질학과(현재 지구환경과학부)에 입학해 학사모를 쓰기까지 45년이 걸렸다. 서울대 학부 졸업장만 세 번째라고 했다. 수의학과 66학번, 경영학과 74학번, 지구환경과학부 75학번. 중단된 공부를 마치려고 2016년 지구환경과학부에 재입학한 그는 "이번에 다닌 서울대가 진짜 같다"고 말했다.

"취직 걱정, 결혼 걱정, 돈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이력서 쓸 일도 없으니 점수 욕심도 버렸지요. 오페라, 미술, 외국어 같은 교양 공부로 삶이 몰라보게 풍성해졌습니다. 여태껏 모르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어요. 이토록 아름다운 걸 왜 이제야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알게 돼 감사한 마음입니다."

1971년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5년 지질학과에 편입했지만 한 학기 만에 포기했다. 이듬해 다시 경영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74학번이 됐다. 학부 졸업자에 한해 결원이 있는 학과로 편입 시험을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경영학과를 졸업해 제일제당, 문화일보 등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다. 현재 면역 치료제를 개발하는 '유틸렉스'에서 감사(監事)를 맡고 있다. "인생을 오래 살아보고 나서 돌아간 서울대는 20대를 보낸 그 국립대와는 완전히 달랐다"는 이 만학도를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밥 잘 사주는 멋진 할배

서울대는 올해 코로나 사태로 졸업식을 열지 못했다. 그동안 받은 서울대 졸업장을 다 챙겨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수의학과 졸업장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며 "집사람이 잘 두었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들은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졸업장을 세 번째 받은 소감은.

"좀 복잡합니다. 끝이라니 섭섭하고 더 배울 순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공부한 것을 사회에 나누어 줄 방도는 없나 생각해 봐야죠."

―서울대 홍보팀은 '인접 학문도 아니고 제각기 다른 단과대 세 곳을 졸업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50년 전에 시작한 마라톤을 마침내 완주한 기분이 어떠냐고 누가 묻던데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니었어요. 70이 넘어서 공부한 게 흐뭇하고 자랑스러울 뿐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좁고 깊게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살아 보니 한 우물만 파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더군요. 거기서 나와서 넓은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옆도 볼 줄 알아야죠. 우리 세대는 젊을 때 모두 가난했고 '새빠지게' 일했잖아요. 아름다운 걸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살았고. 이번에 서울대에서 공부할 땐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유엔 공용어 여섯 가지를 다 익혔습니다."

―외국어를 여섯 가지나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가 유엔 공용어입니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이겠죠. 저는 추가로 이탈리아어까지 배웠어요."

―경제활동과는 무관해 보이는데 왜 재입학을 했습니까.

"2007년에 집사람이 난소암 진단을 받았어요. 수술이 잘됐다고 했는데 2010년에 재발했습니다. 사표 내고 5년간 붙어서 간병했어요. 2015년에 혼자가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떠나자 제 삶도 휑뎅그렁해졌지요.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방황을 했어요. 사실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요?

"아들 둘이 다 의사인데 어느 날 둘째가 '졸업하지 못한 학교를 다시 다니면 어떻겠느냐'고 권했습니다. 처음엔 '야, 말이 되니? 내가 몇 살인데 그걸 해?' 그랬지요. 서울대에 전화해 학번을 불러줬더니 '(재입학) 할 수 있으니 오십시오' 하는 거예요. 그래도 고민은 되더라고요. 교수들이 아들뻘이잖아요."

―학생들은 선생님을 뭐라 불렀나요.

"선배님? 할아버지?(웃음) 나이로는 반세기 차이라서 호칭이 어려웠을 거예요. 모르는 게 많은 제가 학생들에게 밥을 자주 샀지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밥 잘 사주는 멋진 할배'였군요.

"과마다 '족보'라는 게 있잖아요. 밥 사주면서 어느 교수는 무슨 문제를 잘 내는지, 과제는 어떻게 작성하는 게 좋은지 정보를 얻었지요. 아휴, 저는 컴퓨터로 하는 수강 신청부터 애먹었어요. 인기 있는 과목은 개설되자마자 자리가 동나버려요. 언론사에서 일할 때 기자들한테 컴퓨터를 사주기만 했지 제가 타자할 일은 없었거든요. 전자 기기를 잘 다뤘다면 더 신나게 공부했을 텐데…."

―강의 교재도 영어로 된 원서(原書)였겠지요.

"1975년에 처음 지질학을 배울 땐 광물 이름이 전부 한자였어요. 재입학해 보니 영어로 다 바뀌었더군요(웃음). 원서를 사전 찾아가며 읽다가 나가떨어졌지요. 아들에게 '일주일에 진도를 60 페이지씩 나가는데 나는 종일 해도 2~3페이지다. 이거 도저히 못하겠다'고 불평했더니 그 원서를 번역한 책이 있다는 거예요. 아들과 며느리들이 도와준 덕분에 낙오하지 않았어요."

성적에 민감한 학생들 안타까워

1977년 경영학과 4학년 때 입사한 첫 직장은 삼성이었다. 삼성전자는 없던 시절이고 제일제당에 배치됐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는데 그땐 누구나 다 그랬다"고 그는 술회했다. 1980년대 경향신문에 기획부장으로 뽑혀 갔고 1991년 문화일보 창간 멤버가 됐다. 경영자 측을 대표해 노조를 상대했다고 한다.

―2001년부터는 벤처기업에 가서 상장(上場)하는 일을 하셨더군요.

"상장은 기업 내실도 좋아야 하지만 잘 포장하고 투자자를 설득해야 해요. 2016년에 서울대에 재입학한 뒤에도 상장 업무를 하느라 1년간 휴학했어요."

―유틸렉스는 어떤 기업입니까.

"면역 항암제를 개발하는 회사로 2018년에 상장을 했어요. 아직 출시는 안 됐고요. 권병세 박사라고 장차 노벨상 후보로 꼽히는 과학자가 대표이사예요. 현재 임상시험 중인데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모든 암에 보편적으로 통해요. 이게 성공하면 엄청난 사건입니다. 우리 집사람 같은 암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거예요. 2014년 국립암센터에서 항암 치료 받을 때 권병세 박사의 면역 제제를 썼어요. 어느 정도 효과를 봤습니다. 감사는 비상근이라 대학 다니면서도 할 수 있었고요."

―서울대 졸업장을 받는다는 소식에 친구들이 부러워하던가요.

"대학 다닌다고 하면 반응은 두 갈래입니다. '야,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느냐' 아니면 '너 정말 생각 잘했다.' 사별하고 힘들어하는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응원하는 쪽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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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수의학과는 왜 갔나요.

"1지망에 낙방하고 아무 생각 없이 쓴 2지망에 붙은 거예요. 막상 배워보니 수의학이 재미있었어요. 저는 수의사 자격증도 있었기 때문에 집사람 간병할 때도 차트를 볼 줄 알았지요. 편입요? 우선 결원이 있어야 하고 교수님들은 뒷말 나올까 봐 안 뽑으려고 해요. 지질학과는 추천을 받아 갔고 경영학과는 정원에 여유가 있었어요. 학생운동 하다 제적된 빈자리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경영학과를 졸업한 건 취직을 위한 현실 타협이었죠. 혼자 남지 않았다면 지구환경과학을 다시 공부할 일은 없었을 테고요."

―반세기 만에 캠퍼스로 돌아간 첫날 좀 떨렸습니까.

"그럴 나이는 지났죠. 저는 당시 어둡고 침울했습니다. 캠퍼스에선 눈에 보이는 밝음이 좋았고 젊음이 좋았어요. 제 또래들과 살다 청년 세계로 시공간을 건너뛴 것 같았습니다. 골프 하시나요? 제가 1991년 안양CC에서 머리를 얹었어요. 1번 홀에서 티샷을 날렸을 때 그 풍경이 지금도 선해요. 완전히 별천지였죠. 아, 이런 세상이 있구나. 이번에 서울대 다녀보니 그것과는 또 차원이 달라요. 오페라도 미술도 영화도 알게 되고 정말 재미나게 보냈어요. 같은 인생을 살아도 뭘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겁니다. 젊은 학생들 틈에 늙은 사람이 끼어서 좀 미안했지만."

―체력도 기억력도 따라가기 버거웠을 텐데요.

"옛날에 배운 지식은 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걔들이 5분이면 깨치는 공부를 저는 50분 들여 이해하는 식입니다. 그래도 막히면 5시간 하면 돼요. 날마다 아침 8시에 등교해 교내에서 세 끼 해결하고 밤 9시에 도서관 앞에서 셔틀버스 타고 나왔습니다. 주말에도 방학에도 학교에 갔지요. 월급쟁이일 때도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번에 해양학을 공부해 보니 자연에는 '죽거나 살거나'밖에 없어요. 부딪치면 먹든지 먹히든지. 자연은 아주 냉정해요."

―더불어 사는 건 자연의 세계엔 없다는 말씀인가요.

"없어요. 일단 붙으면 진검 승부죠. 사회생활도 전쟁과 비슷해요. 서울대 졸업장은 입사할 때만 유리하지, 그다음부턴 회사에 기여하는 직원이 최곱니다. 죽기 살기로 하고 성과도 좋아야 결국 출세하고요."

―요즘 대학생들은 어떻던가요.

"성적에 민감하더군요. 취업 때문이겠지만 좀 딱해 보였어요. 대기업과 사회를 겪은 저는 넓게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압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중고교 때부터 내신을 관리해온 탓인지 몇 점 가지고 벌벌 떨어요. (인생 선배로서 가르침을 주었느냐고 묻자) 무턱대고 그러면 늙은 꼰대죠. 물은 목마른 사람한테 줘야 합니다. 묻지도 않는데 주절대면 '할아버지 일이나 잘하세요' 소리를 듣겠지요(웃음). 제가 가면 분위기가 확 달라져요. 입은 닫고 지갑을 열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그는 홀아비다. 요리 학원을 세 군데나 다녔다고 한다. "처음에는 며느리들이 반찬을 갖다 줬고 배달 음식도 먹었어요. 집사람이 떠날 땐 손주가 하나뿐이었는데 지금은 넷입니다. 제가 자립해야 했어요."

―요리를 해보고 내린 결론은.

"재료비가 과하게 들어요. 혼자 먹기는 많고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맛이 없고. 학교에서 사 먹는 게 최고예요. 학생 식당이 열 곳이 넘어요. 다양하고 갓 한 음식이고 3000~4000원이면 잘 먹을 수 있죠."

―모시고 살겠다는 아드님은 없었나요.

"결혼한 아들은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에요. 며느리의 남편이지(웃음).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아요."

―교수들이 거북해하지는 않았습니까.

"과제를 제출했는데 한 교수가 '선생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걸 보고 저를 돌아보면서 반성했습니다'라는 메모를 적어주셨어요. 제가 늙었다고 점수를 더 주진 않고요."

―졸업 학점은?

"3.29예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게 문제인데, 열심히 따라가되 추월할 욕심은 없었습니다. 내 점수가 너무 높으면 학생들이 취업에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 하하하."

―도서관을 애용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중앙도서관 뒤로 연결된 관정도서관은 삼영화학 이종환 회장님이 600억원을 출연해 지었어요('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하지 못했어도 돈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련다'는 말을 남겼다). 예술과 인문을 공부하기로 작정한 사람한테는 끝내주는 장소였지요. 오페라 리스트 180개 중에 90여 개를 거기서 감상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학을 다녔는데 옛날 대학생과 요즘 대학생은 고민이 다른가요.

"옛날엔 다들 가난했다면 요즘은 그렇지 않고 또 개인적 성향이 강해졌어요. 저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력한 만큼 받지요. 애쓰지도 않고 입 벌리고 홍시 떨어지길 바라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에요. (요즘 대학생들이 그러는지 묻자) 잘은 모르겠어요. 다만 대학원도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일단 도피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성 얘기는 개방적이더군요. 사귀고 헤어지는 게 쉬워지고 참을성은 약해졌고."

―이번에 다닌 서울대가 진짜라고 했는데 가장 큰 수확은 뭔가요.

"학점에 연연하지 않고 관심 따라 수강한 끝에 만학의 기쁨을 누렸지요. 젊은 날엔 전공 공부에 치였다면 이번엔 교양을 쌓았습니다. 외국어를 여섯 가지나 새로 배웠고. 해외여행 할 때 '룸 조인'이라는 거 아세요? 다들 부부가 왔는데 저는 가이드랑 한 방을 썼어요. 남미 여행지에서 스페인어 할 줄 아는 사람은 저뿐이라 인기가 좋았지요(웃음). 혼자 뉴욕으로 잊지 못할 미술 여행도 다녀왔어요. 또 오페라가 이렇게 좋은 줄 5년 전엔 몰랐지요. 즐거움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본 거예요. 여러 번 경험해야 깊은 맛이 우러납니다. 음악도 미술도 인생도 그래요."

―'서울대가 나라 망친다'는 욕을 먹는데.

"그릇된 생각입니다. 국회의원을 많이 배출한 법대는 제외하고 말할게요. 서울대 욕하는 건 단면만 봐서 그래요. 세상은 똑똑한 몇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지, 민중의 공통된 선에 의해 굴러가진 않습니다. 씨앗도 안 뿌리고 노력하지도 않고 열매를 거두려고만 하면 쓰나요."

부모를 잃으면 형제와 슬픔을 나눌 수 있지만 배우자가 떠나면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국희씨는 노년에 대학을 다니며 젊게 산 덕분에 슬픔이 옅어졌다고 말했다. 이번 졸업장은 사모님이 가시면서 남겨준 선물 같다고 하자 그는 "떠나기 며칠 전 새벽 4시에 나를 부르더니 '여보 힘내! 나도 힘낼게!'라고 했는데, 5분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텐데…"라고 했다.

노년은 길어지고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막막하다. 전경련에서 중소기업 자문 위원으로 활동한다는 만학도가 그들을 향해 조언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좀 즐기고 싶어들 하는데 방법을 몰라요. 굳이 서울대일 필요는 없습니다. 구청 문화센터도 좋아요. 기다리지 말고 두드리세요. 뭔가 배우면 즐겁습니다. 또 할 수 있다면 봉사하세요. 배우는 데 30년, 일하는 데 40년, 베푸는 데 30년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재미나게 사는 길입니다."

출처 : 조선일보/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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